선비의 고장 영주(소수서원, 선비촌 탐방)

지난번 영주 소수서원이랑 선비촌 댕겨왔는데
게을러기도 하고 식량 구하러 댕기다가 깜박 해서
시방 사진을 올려 보네요

 

저도 처음인데 소수서원이랑 선비촌이 붙어 있어요
글구 입장료 내면 두군데 다 구경 합니다.

빵과 버터 형님이랑 소수서원으로 스르륵 들어 갔습니다.

 

 

  

선비정신!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청렴결백하고 지조를 중시하여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한 정신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아 마음과 행동이 깨끗하여야 한다.>
대문에서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은 선비다운 마음으로 둘러보까 합니다.

 

 장승의 모습에서 ~
어떤 느낌?
찌그러진 정신상태를 가다듬고 이곳을 통과하시오?~~ㅎㅎㅎ


주막집도 멋지구요?
시간이 풍족하면 막걸리 한잔 여유있게 하련만은~

 

 

죽계교 다리를 건너면 소수서원 이래요

소나무와 하늘!
마음까지 시원합니다.

 

 

 

죽계교를 건너는 선비님들!
오늘 무슨 행사를 하는가?
선비복장을 한 선비들이 우르르 몰려 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사회가 견뎌내는 것 아닌가?

 

 

낙동원류 죽계천
소수서원 왼쪽으로 들어가면 이런 개울이 나오고요
물가에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있어 경치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취한대(聚寒臺)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 라는 뜻에서
 엣 송취한계(松聚寒溪)의 비취(聚)자와 차가울 (寒)자에서 따온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한 곳이라 합니다.

 

 
백운동(白雲洞) 경(敬)자바위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 글씨는 퇴계 이황 선생 글씨로 전해오고,
 붉은 경자는 신재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신재집에 전해오며,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라 합니다.

 

세조 3년 (1457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영주 순흥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어 그때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리 흘러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희생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각(刻)한 글씨에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내려 옵니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은 세조 3년 (1457년)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임금(노산군)을 내쫒고 왕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반대하여 이곳 영주 순흥읍으로 귀양와 단종복위운동을 펴다
사전 탄로되어 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이라 합니다.

 

 소수서원
평소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라 합니다.

 

주세붕이 안향선생을 배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수서원에는 이후 1544년(중종39)에 안축(安軸, 1287~1348)과
안보(安輔,1302~1357)가 추가 배향되었다합니다..

 

 1546년(명종1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향사와 토지, 서적의 운용과 관리 등에 관한 서원의 운영방책이 보완되고 경제적 기반도 확충되어
 서원은 확고한 기반 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1633년에는 설립자인 주세붕 선생이 소수서원에 추가 배향되었다 합니다.

 

 

 

 

학자수림(學者樹林)
 겉과 속이 모드 붉다하여 적송이라 부르며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주변을 뒤덮고 있습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림이라고 부릅니다.

 장서각과 영정각 관수대와 직방재

경내를 한참 돌아 댕겼습니다.
그냥 정신없이 돌아댕기면서 셔트를 눌러대다보니

빵과 버터 형님과 따로국밥!이 되어 버렸네요, . 어딜가셨남?
보이지도 않고~

 

 저기 계시네~

 강학당!. 보물 제1403호 이며 건물은 원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강당으로 길러낸 원생은 4천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1501~1570) 선생 문하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공수(拱手) :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의 뜻을 나타냄.
모습을 보니 목에 패찰을 단 사람들은 체험자들이고 가운데 옥색두루마기를 입은 분은 현존하는 선비가 아닌가 싶어요!

 

 ===========================================================

선비촌으로

 

 

 선비촌은 3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개공간:憂道不憂貧,修身齋家,居無求安]

-------------------------------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김세기家, 김뢰진家, 장휘덕家, 이후남家, 김규진家, 두암고택가람집

 

우도불우빈이란

가난한 속에서도 바른삶을 중히 여긴다는뜻

憂道不憂貧의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선비들의모습을 엿볼수있게 조성하였습니다

---------------------------------

수신재가(修身齋家)

김상진家, 해우당고택, 강학당,

 

수신재가는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뜻

수신재가공간은 자기 수양을 위해 노력했던 영주 선비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교육방식도 직접 체험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거무구안(居無求安)

김문기家,만죽재

 

거무구안이란

사는데 있어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뜻

거무구안의공간에서는 명상과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 하지않고 현실의잘,잘못을 비판한 영주 선비의굳은

기개를 엿볼수 있게 하였습니다.

.

 

다시 빵과 버터형님을 만나 선비촌으로 향합니다.
이혼하지 말고 계속 붙어 댕기자고 했는데
또 없어졌습니다.

 

 

  

초가집도 있구요

 

 

기와집도 있네요

 

 

 

에구! 저런데서 낮잠이나 푸욱 자봤으몀 좋으련만

 

 

암튼 마음이 편안해 지는 풍경!
오랜만에 고향에 온 기분 입니다.

 

 

좀 잘사는 양반동네의 모습!

 

 

1.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김세기가, 김뢰진가, 장휘덕가. 이후남가, 김규진가, 두암고택가람집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란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사는 것에 욕심이 나서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도불우빈의 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 수신제가(修身齊家)

김성진가, 해우당 고택, 강학당  수신제가(修身齊家)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 입니다.
선비들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을 힘쓰며 일상의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일, 곧 수신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는 유학의 실천적인 학풍에 의한 것으로 선비들은 수신을 위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3.거무구안(居無求安)


김문기가, 만죽재, 정사 '거무구안(居無求安)’이란 사는데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살아갈 길을 고민 하였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인격수양의 길로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거무구안의 공간에서는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않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 선비의 굳은 기개를 엿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4.입신양명(立身揚名)

두암고택, 인동장씨종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에게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의 길은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얻는 일이었다.
입신양명의 공간에서는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띠리리리!~ 빵과 버터형님 전화입니다.
언능 나오래요!

집에 가자고 하네요!~

 

 

나는 언제쯤 자유인이 될것인가?
그냥 이자리에 머무르면서 보고 느끼고 하면 안되는가?
일상으로 돌아 가야 하는 시간!

내일 새벽 5시에 식량 구하러 가야하는데!~
에이 그놈의 식량이 뭔지?

 

산 타는것 보다 더 어려운 소수서원과 선비촌 역사탐방!
평소 선비하고는 거리가 먼 불초소생이 어려운 글 업어다 쓰느라 골치가 지근거리네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