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오후(미리내 성지에서)

 

 

일요일!
아들휴가도 끝나는 날이고 모처럼 딸아이도 집에왔습니다.
이번주에는 온 가족이 가까이 미리내 성지에 바람씌러 댕겨왔습니다.

 

안성에서 가장 맛있다는 중국집에도 들릴 예정입니다.
아이들이 집에 머무르니 밥을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것 같은 느낌 입니다.


이제야 부모의 마음을 좀 알것 같기도 합니다.

딸아이도 대학 4학년이 됨니다.
엊그제 목욕시켜준것 같은데, ~~세월이 빠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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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가 천주교의 성스러운 곳!
미리내 성지에 대하여
사진으로 담고 글을 쓴다는것이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편안하게 처다보고,

본대로 느낀대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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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성인 기념 대성당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 왔으며,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포탄제작을 위한 징발을 당해 하마터면 훼손될 뻔하였다 합니다.

 

  

 주차장에서 처음 눈에띄는 글!

 

 

== 미리내 성지의 유래====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와 인근의 이십리 안에 있는 한덕골, 골배마실, 검은정이 등의 교우촌들은 본래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산속을 찾아들어와 미리내      
인근 산골짜기로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훗날 미리내는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이곳 골짜기 마다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주로 척박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출처 : 충주전통문화회

 

 미리내 성요셉 성당 1906년 건립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 편에는,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들 자녀에게 천주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미리내 교우촌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성당 옆에 있는 깊은 우물은, 강도영신부와 본당

신자들이 목을 축이던 유서 깊은 우물이라 합니다.
현재 복원공사 중으로 우물전각이 세워지고 있었어요.

 

 박해, 고통

 

 

< 가족>

 

 밴취에 앉아 휴식을 취해 봅니다.

천주교 재단 고등학교를 나온 아들놈이 천주교에 대해 열심히 설명 합니다.

 

< 하늘>

  파란 하늘에는 크레파스를 칠해 놓은듯 비행기가 날아 갑니다.

 

 

 

소나무!
 
바람과 햇빛과 세월을
미리내 성지와 함께~
 경당가는 오솔길에 서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끈>

 아들은 엄마랑

     딸은 아빠랑 손잡고 걸어갑니다.

          손을 내민적도 없는데~~

 

그냥 자동 입니다.

당초에는 붙은 몸이기도 하지요

             

 경이로운 자연

                                                                     매화가 눈웃음 쳤습니다

 

 

경당

소규모의 성당처럼 모든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으며,  김대건 신부와 그의 어머니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으로 모셔와 안장했던

이민식의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묘소입니다

 

 

경당앞 쉼터
계곡길을 오르면 시궁산으로 가는 등산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니’
순교 영성이 흙으로 깃 든 미리내 성지의 진토(塵土)

 

 

 


  

 김대건 신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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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파수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은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 경당앞 묘비에 쓰여진 글 입니다
 
 

금방 종소리가 울러 퍼지는듯한 ~~
신비감과 고요 그런 본위기!

 

103위 성인 기념 대성당에도

해가 저물어 갑니다 

 


 


 

 기도!

그냥 무심코 처다먄 보아도
마음이 쏠림니다.

 

저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얼마나 평온할까?

 

 아들이 이담에 돈벌면 저런 별장 지어 준다고 합니다.
통나무로 불을짚혀 굴뚝에 하얀 연기가 피어 오름니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은 함 믿어보지 뭐!~

 

미리내 성지 입구

미산 저수지에 황혼빛이 내려 앉았습니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지요.

 

봄볕이 내리는 3월1일 오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 16인 무명 순교자들이

꽃피운 순교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성지순례후 집으로 돌아오는길

 

비록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모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짐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미리내 성지 바로가기 

http://www.mirina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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